[카디] Arbitrage 3
: Posted by 슈크림
Arbitrage를 읽으시기 전, 우선 이 글은 Fumerie님이 쓰신 외국픽 Arbitrage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으로, 완전한 권한은 Fumerie님께서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만 한 것임을 밝혀드리는 바입니다.
원글 http://fumerie.live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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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bitrage
W. Fume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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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다, 경수는 과거로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라는 것과, 종인은 미래로 시간을 여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종인이 제 머릿속에서 제대로 된 연대 표를 그리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처럼 이렇게 미래로만 시간여행하는 타입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두 번째 타입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나는 이런 시간 여행을 하는 것 자체가 있을지는 꿈에도 몰랐다."
경수가 눈알을 굴리며 저의 지갑에 어지럽게 꽂혀있는 영수증을 꺼내어 영수증 뒷면에 표를 하나 그렸다. 경수는 가게별로 카드별로 모든 영수증을 저의 지갑 속에 다 모아두는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짧은 연필로 영수증의 뒷면에 표를 대충 그려 넣었다 - 선들과, 회로, 그리고 뾰족한 모서리들을 그렸다.
"자 여기 차 사고가 중점이야. 항상 회로는 차 사고를 중점으로 두고 시작되는거지. 콘크리트 건물에다가 차를 그대로 들이받던, 절벽에서 차를 끌고 자살을 하던, 상관은 없는 거야. 그게 그냥 사고이기만 하면 돼."
경수가 연필로 BMW의 핸들을 가볍게 툭툭 쳤다. 그들은 따뜻한 오렌지 색감의 차 내부 안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경수는 저가 그린 그 작은 표를 보여주기 위해 종인에게로 몸이 기울어져 있었다.
"맞아."
종인이 경수의 어깨에 저의 팔을 두르며 경수를 저의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에 경수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래. 그럼 차 사고가 나는 때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차 사고를 낼 때면, 원래 시간의 한 주쯤 뒤로 보내져. 단 며칠 뒤로 보내질 때도 있고, 한 주나, 두 주 뒤로 보내질 때도 있었고. 그때그때 달라져. 시간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지금까지 알아낸 바 없고. 그럼 나는 이렇게 원래의 시간보다 뒤로 보내지는데 - 여기를 A 지점이라고 해놓자. 그리고 내가 원래 있었던 곳은 B 지점이라고 해놓고... 그러면 이제 두 버전의 내가 생기게 되는 거지."
경수가 거칠게 A 점과 B 점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두 점을 하나의 선으로 이었다.
"그러면 과거로 보내진 오리지날 경수가 있고, 차 사고가 난 시간부터 그저 그렇게 쭉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복제 경수가 있는 거지. 그럼 오리지날 경수는 자신이 시간을 타고 넘었던 A-B 구간대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생겨. 그리고 B 지점이 다시 차 사고가 난 그날로 되돌아오게 되면, 복제 경수가 차 사고를 내고 과거로 보내지는 거지."
복제 경수에서부터 화살표를 하나 그려 A 지점으로 이었다.
"그리고 오리지날 경수는 연대 표에 자기 자신만이 있는 것처럼 다시 살아가기 시작하지."
종인이 경수가 그린 그 화살표들이 마구 어지럽게 그려진 작은 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와 너 그림 진짜 못그린다. 다섯 살 짜리 애도 네가 한 것 보다는 잘 그릴 수 있을거다."
경수가 종인의 등짝을 한 번 쳤다. 그에 종인이 장난스레 웃어 보이며, 다시 표 위의 B 점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데 만약에 복제 경수가 차 사고를 내지 않아서 과거로 보내지지 않으면 어떡해? 그러면 오리지날 경수는 없어지는 건가?"
"그건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던 일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고. 난 항상 이 시간 회로를 짠 후에, 그 계획을 실행시켜. 그 계획이 틀어지면 안 돼."
"그런데 오리지날 경수는 그 새로운 연대 표에서 무언가를 바꾸잖아. 그걸로 인해 원래의 시간에서 일어날 일도 바뀔 수가 있을 거고."
"오리지날 경수는 작고 차 사고와는 일말의 연관도 없는 것들만 바꿔."
경수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종인은 경수의 볼을 쿡 찔러서 경수를 웃게 만들고 싶다는 충동을 적잖이 느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럼 지금 여기 있는 너는 그 시간 회로를 타고 있는 경수인 건가?"
"내가 지금 여기에서 너랑 놀고 있는 건 내가 지금 시간 회로를 타고 있으니까 그런 거야."
경수가 약간 짓궂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저의 표에 대한 설명을 다 끝낸듯 종인에게서 조금 떨어진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건 오리지날 경수인 거야, 아님 복제 경수인 거야?"
"복제 경수."
"그 말인즉슨, 이 도시 어딘가에서 너랑 똑같이 생긴 오리지날 경수가 막 뛰어다니고 있다는 건가?"
종인이 얄궂게 얼굴을 찌푸렸다. 끝내 두 명의 경수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마주치는 상상까지 도달했다.
"오리지날 경수는 지금쯤 A 지점과 B 지점 사이의 기억을 쓰면서 내- 아니 우리 사무실에 있을걸."
경수가 종인의 생각을 읽을수 있다는 듯, 종인의 어깨를 한 번 쳤다.
"그래서 그 과거로 보내진 시간에 넌 뭘 하는 건데? 실수를 다시 고쳐놓기라도 하나? 아님 뭐 복권이라도 사는 거야?"
"그럴 수도 있고, 두 번째 기회를 잘 잡는 거지. 그게 내가 돈을 버는 방법이야. 주식을 사고팔고, 거래를 성립시키고. 나는 이 기억들을 다 모아서, 차 사고를 낸 다음 과거로 돌아가서 내 일에 활용해. 아니면 뭐 내 개인적인 계좌에다가 돈을 좀 채워 넣는다거나."
"그럼 지금 너는 주식 시장도 다 파악하고 있겠다, 거래 계약서도 있겠다, 왜 여기서 나랑 이러고 있는 거야?"
"오리지날 경수가 시간 회로에 나타날 때에는 내 삶을 대체하는 거야. 한마디로 오리지날 경수는 투자 은행의 거래자 도경수인거지. 저 강남 어딘가에 침실 두 개가 딸린 아파트에 살면서, BMW를 타고 출근하며, 여의도에 한강 옆에 떡하니 세워진 유리빌딩에서 호화로운 점심 식사를 하고 살겠지. 오리지날 경수가 그렇게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휴가를 받은 셈이라고나 할까. 좀 싸고 낡은 차로 차 사고를 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오리지날 경수가 되어 여의도에 위치한 내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할 때까지, 나는 놀고먹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저기 도시 반대쪽 작은 원룸에서 주식시장을 확인하고, 그 정보를 다 머릿속에 집어넣지."
"그렇게 돈을 벌고?"
"엄청난 이익이 생기는 거지. 처음엔 예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기회를 잡는 거야. 반응을 예측하고 거래를 성사시키며 실패는 피하지."
경수는 자신이 갖게 되는 시간 여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낸다. 저 자신의 과거를 바꾸는 것. 조심스럽게 계획을 세우고, 저 자신의 미래를 계산한다. 미리 예측된 대외적인 것들을 적극 활용한다.
"난 그저 작은 것들만 바꿔. 다음 보너스를 받을 수 있을 만큼만. 아니면 승진을 위해서 라던가. 아니면 내 은행 계좌에 조금 쌓아둘 수 있는 것을 위한 것이라던가. 계획만 잘 세우면 될 것들이야."
"그래서 오리지날 경수가 네 은행 계좌에 돈을 넣기를 기다리며 너는 네 휴가를 즐길 동안, 약간의 취미로 레이스를 즐기는 거다, 이거지. 이상한 레이스 그룹에서 미친놈들이랑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말이야."
종인의 손가락이 담배를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경수는 제 옆에 있는 담뱃곽에 종인의 손끝 털 한 가닥도 닿지 못하게 했다.
"뭐, 그런 셈이지. 약간의 스릴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그 빠른 스피드와 흥분감이 좋아. 투자 은행에서 양복만 입고 일하는 경수가 즐기게 될 스릴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지."
경수가 입술을 벌려 이가 훤히 다 드러나 보이도록 히죽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종인은 경수가 저의 실제 나이보다 굉장히 어려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 사람들이 하는 말 있잖아. 돈은 시간이라고. 그 말대로 너는 진짜 시간으로 돈을 벌잖아. 와, 네 연대 표 진짜 뒤죽박죽인데?"
종인이 경수의 손에서 영수증을 조심스레 가져오며 웃었다. 경수는 작은 손을 가졌다. 정갈하게 정리된 손톱도 그랬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손이었다.
"뒤죽박죽은 아니고. 말했잖아, 난 모든 것들을 계획한다고."
"어, 근데 확실히 내 시간 회로 보다는 더 머리 아프다."
종인이 경수의 손아귀에서 연필을 가져가 경수의 복잡한 표 밑에 작은 초승달 모양의 곡선을 그렸다.
"그래서 넌 차 사고를 내고 미래로 간다고?"
"그렇지. 차를 들이받고, 다음 날에 일어나면, 한 일주일 뒤고. 이주일 뒤고. 한 달 뒤고. 네 달 뒤고. 그때그때 달라. 잘은 모르지만, 그 차 사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달리는 것 같아."
종인이 저가 그린 표 옆에 저의 이름을 작게 써 넣는다.
"네 그림도 만만치 않구만. 그림 완전 못그린다 너. 네 글씨 하나도 못 알아 보겠다."
"꺼져, 내 게 네 것보다 몇 배는 더 깔끔하거든. 나는 내 인생의 되감기 버튼을 아주 많이 누르는 셈이지. 뛰어넘고, 뛰어넘고, 뛰어넘고. 현재는 쉽게 지겨워지기 마련이야. 왜 머무르고 왜 기다리는 거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현재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을 건데. 계획 그딴 거 없어 나는. 그냥 미래로 머리 먼저 들이밀어보고 보는 거지. 아주 간단하고, 아주 신속해 나는."
"그건 좀... 불안정하지 않냐."
"그건 너한테만 해당 되시는 거고요. 내가 만약에 내 인생을 회로에 따라 살아가야 하고, 어떤 지점을 계속 반복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난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종인은 계획이란 것을 짜는 데에 대해서는 전혀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종인이 경수를 자신의 인생을 계획해주는 것에 고용을 하는 것을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재빨리 제 아이디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내버린다.
"하다 보면 점점 쉬워져. 두 번째로 할 때에는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줘."
그날 밤, 그 둘은 고속도로 끝에서 BMW를 벼랑 끝으로 떨어뜨렸다. 종인은 점화장치에 차 키를 꽂아두고, BMW가 중력에 못 이겨 아스팔트 바닥으로 무참히 추락하는 광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그날 밤에는 그 누구도 과거나 미래의 시간으로 뛰지 않았다. 부서지는 유리 소리와 금속 파편들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동안에 경수가 종인에게 바베큐 파티에 함께 가자며 제안했다.
듣자 하니 준면의 집에서 토요일에 바베큐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다. 경수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초대받았다고 했다. 그에 종인은 경수에게까지 준면의 초대장이 닿는 것을 조금 아이러니하게 생각했지만, 종인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우리 열 명이 이렇게 같은 자리에 모이게 된 게 얼마 만인지... 여하튼 굉장히 오랜만이다!"
준면이 저의 집 뒷마당의 길고 큰 테이블에 상다리가 휘어질 듯 차려진 고기와 샐러드로 몰려든 사람들에게 크고 또렷한 목소리고 첫 건배를 외쳤다. 사실 음식이나 차 엔진 등의 자잘한 것들로 서로 티격태격하던 그들이 조금 진정을 취하고 준면의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경수와 이씽이 저쪽 코너의 바베큐 그릴에 서서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경수가 마치 엄마오리처럼 사람들에게 잘 익은 고기를 하나씩 전달했다. 모두의 정신이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에서 정원에 물을 뿌리는 호스로 장난을 친다거나 하는 다른 것들에 집중되기까지 종인은 식사 내내 경수의 옆에 딱 붙어있었다. 종인은 그들과 함께 장난도 치며,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종인은 그들과 마지막으로 이렇게 놀아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이씽이 다른 곳을 보고있을때 이씽의 음식을 훔쳐 먹는다거나, 종대가 나르던 종이컵들을 쳐 떨어뜨린다거나, 찬열과 백현과 함께 지난 모터 쇼의 소녀팬 놀이를 하기도 했다.
"네 얼굴 마지막으로 본 적이 되게 오래된 것 같은데, 오랜만에 이런 곳에서 네 얼굴 한 번 볼 수 있어서 좋네."
민석이 살짝 웃어보이며 제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하자는 시늉을 했다.
"많이 지나지는 않았으니까. 몇 달 전쯤에 네가 인천 트랙에서 내 차를 들이받았던 그날 이후로는 부쩍 자주 보인듯하다 너."
"어, 저번에 그 일에 대해서는 미안해."
종인이 쑥쓰러운듯 웃으며 민석의 팔이 제게 닿지 않을 만큼 민석에게서 옆으로 조금 떨어졌다.
"이번에는 오래 있을거야? 세훈이가 네 걱정 많이 하더라. 네가 그 몇 달 동안 어디로 사라지는지."
"민석아, 난 더이상 애가 아니야."
종인이 저의 눈꺼풀을 살짝 닫았다. 세훈이 저 멀리서 저를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세훈한테 전해. 괜히 내 눈치 보지 말라고. 나한테 얘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라고. 걔한테 화난 거 절대 아니고, 너한테도 화난 거 아니야, 정말."
그 말에 민석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네가 그때 처음 사라졌을 때 우리 엄청 걱정했었어. 한 달도 아니고, 다섯 달이나. 그 다섯 달동안 아무런 소식도, 아무런 인사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잖아. 네 차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완전히 부러져서 심지어 운전석은 완전히 움푹 팬 채로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어. 그런데 아무도 없었고.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봤어. 세 달이 지나서는,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그 최악의 상황까지 준비했어. 그 후로는 세훈이가 몇 주 동안이나 나한테 말 한마도 하지 않더라. 죄책감을 느꼈던 거야. 나도 그랬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였어."
"그 날 밤에 너 우리한테 화가 단단히 났었잖아. 내가 너를 제지할 수 있었고, 멈출 수 있었어."
"뭐 때문에? 난 그냥 떠나서, 다섯 달 후에 돌아온 것뿐이야. 아무 이상도 없는 채로. 난 그냥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이야. 말해줄 수도 있었는데, 어, 그래, 네가 말한 것처럼, 난 화가 났었어. 어리고 멍청했었다고. 어린애들은 항상 멍청한 짓을 해.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내가 너를 다른 애들로부터 떼어놓는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
"김민석."
종인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 시원한 맛이 다 가버린 제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말했잖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난 어리고 멍청했지만, 지금은 나아졌어. 나는 내 직업이 있고, 내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 이런 것들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야, 민석아. 사람들은 항상 갈라지고, 다시 붙기 마련이지."
종인이 일어서며 민석의 어깨를 가볍게 한두번 쳤다.
"나랑 얘기해줘서 고마웠어."
그날 밤, 파티가 파한 후에, 모두가 서원길 트랙으로 몰려들었다. 종인은 경수, 찬열, 세훈과 다른 아이들을 보며 준면과 종대와 함께 금액을 배팅했다. 그날 밤은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윙윙대는 엔진의 높고 큰 소리가 매서운 여름날의 더위를 갈라놓았다. 경수의 새로운 제네시스는 아주 완벽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점점 밤의 열기가 무르익어갈때 즈음에, 종인은 모두에게 손을 흔들고 끌어안으며 이별의 인사를 했다. 저를 향한 경수의 큰 눈은 무시했다. 종인은 끝까지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으며 저의 은색 렉서스를 타고 밤의 끝자락을 향해 시원스레 달렸다. 레이스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터널 벽에 최고속 스피드로 차 앞머리부터 들이받을때의 익숙한 흥분감은 가히 따라올 수 없었다. 금속이 처참히 뭉개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유리파편들이 깨지는 소리, 그리고-
모든 것이 검게 변했다.
***
경수는 저도 모르는 사이 종인이 제 집 현관문 앞에 엄마 잃은 푸들처럼 쭈구리고 앉아있던 것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경수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면 종인이 제 눈을 덮은 앞머리 사이로 경수를 향해 얄궂게 웃어보인다. 종인의 두 눈 아래로 길게 내려와있는 다크서클이 종인의 피로함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얼굴에는 생기가 없어 보였고,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윗입술과 인중이 만나는 부분에는 약간의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아마도 코피가 난 듯했다.
"이번엔 얼마나 됐어?"
종인이 경수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경수의 뒤를 졸졸 따라 부엌으로 왔다.
"모르겠는데, 네가 확인해봐."
경수가 종인의 어깨를 잡고 아침 신문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부엌 식탁 쪽으로 돌렸다.
"음...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났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길다."
종인이 신문 헤드라인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난 네가 뛰어넘은 시간같은 거 신경 안 쓰는줄 알았는데."
경수가 비닐봉지에서 저가 방금 사들고 온 떡과 양파 몇 알을 꺼내 종인에게로 흔들어 보였다.
"별로. 그렇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야. 그래서 점심은 뭔데? 떡볶이 만드는 거야?"
"너 우리 집에 와서 밥 공짜로 많이 얻어먹잖아. 나 요리하는 것 좀 도와주지?"
경수가 부엌칼을 종인의 손에 쥐여주며 양파를 썰으라고 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종인의 칼질은 볼품없었다. 썰어진 양파의 모양들이 하나같이 삐뚤빼뚤하고 크기도 저마다 각각 달랐다.
"나 때문에 재료같은거 더 많이 사는거 같애, 요즘. 어, 거기 고추장 좀 더 넣어. 그리고 나중에 위에다가 치즈도 뿌리고. 알았지?"
종인이 경수의 어깨를 제 몸을 살짝 밀착시키며 경수의 등을 살짝 쓸었다. 낯설지 않은 종인의 체온에 경수는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종인은 눈을 반으로 접으며 흰 이를 다 드러내 보이며 웃어보였다. 경수는 생각했다, 종인이 웃으면 더 어려 보이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아이 같은 모습이라고.
"너 몇살이야? 네 진짜 나이 말이야. 너 같은 경우는 네 인생의 몇 달이고 몇 년을 뛰어 넘었으니까, 네 진짜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네 나이보다는 더 어리겠지. 그렇지?"
"몰라, 나도 사실 기억은 안 나거든. 세지를 않아서."
종인이 혀를 내어 제 아랫입술을 한 번 훑었다. 종인에게 있어서 시간은 제 의미를 잃어가는듯 했다.
"그럼 몇 년도에 태어났어?"
"1994년 1월, 아마도? 빠른 94라 나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도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었는데. 그럼 너는 몇 살인데?"
"나도 빠른 93인데. 내가 너보다 형이다.":
경수가 후라이팬에 가득 담긴 빨간 떡볶이를 저으며, 2인분의 라면을 넣었다. 종인이 제 앞의 음식에 신이 난 듯 젓가락으로 라면을 쿡쿡 찔러대더니 이내 휘젓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너는 네 인생에서 몇 달이고 몇 년을 반복해서 살아왔으니 네 친구들보다는 한 몇 살은 더 먹었을 테고, 맞지? 네 친구들 보다 더 빨리 늙겠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한 28살이나 29살 쯤으로 보는데, 그게 그 사람들의 나이라서 그렇잖아. 그런데 실제로 너는, 한 30 몇 살 쯤 됐을 거 아니야, 아닌가?"
종인이 행주로 식탁을 깨끗이 닦았다. 떡볶이가 가득 담긴 큼지막한 후라이팬이 식탁 중간에 놓여졌다.
"어, 그런 너는 네 친구들 보다 몇 살은 더 어리겠네. 나도 내 진짜 나이는 몰라. 반복해서 살아온 시간은 세질 않아서."
경수가 종인의 앞접시와 저의 앞접시에 떡볶이를 가득 덜어 담았다. 종인은 물을 두 컵 떠서 하나는 경수의 앞에, 하나는 제 앞에 조심스레 놓았다. 모든 것이 쌍을 이루고 있었다.
"웃긴 게, 우리가 시간 여행을 할수록, 우리 나이차는 더 많이 나겠지."
"아니면 우리가 이 시간 여행 회로에서 영영 벗어나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거나. 누가 알아? 사람들이 나보고 동안이라고 그러더라."
경수가 제 하트입술을 내보이며 웃었다. 라면을 제 앞접시에 덜고서는 후후 불며 식기를 기다렸다.
"그러는 너는 왜 끝까지 달려보지 않는거야? 시간의 끝으로 계속 가는거야. 할 수 있을거 같아? 너 지금 부쩍 여기서 머물고 있잖아."
둘은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떡볶이와 라면을 퍼서 먹는데에 바빴다.
"내 생각엔 네가 네 친구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렇지? 만약에 네가 계속 시간 뛰어넘어서 모두가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넌 더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는거지. 시간 밖에서, 떠돌이가 된 채. 아무에게도 돌아올수 없겠지. 넌 네 생각보다 네 친구들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는거야."
종인이 제 젓가락을 물고는 멍하니 제 앞접시를 바라보았다. 식탁 밑에서 종인의 무릎이 경수의 다리에 닿았다.
식사를 다 끝낸 후에 함께 부엌 뒷정리를 했다. 경수가 설거지를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접시를 건조대에 올려놓기를 무섭게, 종인이 격렬히 경수의 어깨를 잡은 후 부엌 찬장으로 밀어붙이고 키스했다. 경수의 부드러운 입술에 조금은 거친 듯 한 입술이 닿았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종인을 떼어내려 어깨를 잡고 세게 밀어내려 했지만, 종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경수는 힘이 빠진 것인지, 점차 수긍을 하는 듯이 종인의 어깨 부근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숨이 차오는 것인지 종인이 잠시 경수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떼어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긴장감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경수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떼었지만, 종인은 다시 고개를 틀며 경수의 입술을 덮었다. 이윽고 말캉하고 뜨거운 혀의 촉감이 경수의 아랫입술에 닿자, 경수가 종인을 힘차게 밀어냈다.
"왜?"
종인의 짙은 쌍꺼풀과 깊은 눈동자가 경수를 바라보았다. 종인의 손은 경수의 엉덩이 부근을 더듬고 있었다. 약간은 풀린 듯, 확고한 손짓으로 경수의 몸을 탐했다.
"이런걸 원하는 거 아니였어?"
종인의 손가락이 경수의 바지 앞섬을 더듬거리자, 경수는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눈을 감았다. 이미 약간 늦은 감이 있었지만, 경수는 제 앞섬을 계속해서 문질러대는 종인의 손가락을 힘껏 쳐냈다. 그러자 종인은 제 몸을 경수의 몸에 한껏 밀착시켰다. 종인의 몸이 제게로 전해주는 온기는 뜨거웠고, 또 낯설지 않았다. 종인의 허벅지가 경수의 다리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그 둘의 키 차이는 경수가 종인의 품 안으로 완전히 기대게 만들었다. 그에 경수의 허벅지는 완전히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했다. 종인의 뜨거운 체온이 바지의 얇은 천을 가르고 경수의 몸을 탔다.
"너는 항상 그래, 항상 바르고, 딱딱 들어맞고... 네가 네 자신을 놓을때는 레이스 할 때. 네 인생을 계획하고, 잘 짜여진 틀 안에서 생활하고.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종인이 경수의 턱 밑에서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뜨겁고 이질적인 감촉의 혀가 경수의 목선을 훑으며 내려갔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생소한 느낌에 경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소리는 점점 뜨거워졌고, 뜨거운 숨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경수는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종인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가끔은 네 자신을 조금 풀어줘야 할 때도 있어... 약간만. 아주 약간만."
종인이 허벅지가 경수의 허벅지를 조심스레 받혔다. 그러자 경수가 중심을 잃고, 종인의 위로 쓰러졌다. 이윽고 굶주린 맹수가 먹이를 찾아다니듯 종인의 손가락이 경수의 바지 버클에 닿자, 경수는 재빨리 종인의 손을 쳐냈다. 종인은 제 몸의 긴장감과 극도로 치솟은 흥분감이 제 몸에서 완연히 빠져나갈 때까지 경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경수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종인은 저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쉬운 듯 경수의 목선에 저가 수놓은 붉은 자국을 보았다. 그에 경수는 종인에게 사과를 하려 했지만, 경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다름 아닌 "그렇게 생겼어"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겼다니?"
종인이 경수에게서 멀어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왜 그런거 있잖아. 한 두번 잠자리를 가진 후 다들 나가 떨어지는 거. 다들 널 원하지만, 그 누구도 널 가질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 두는거지."
"아,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래서 뭐, 넌 나랑 자고 싶지 않은거야?"
"어, 벌로. 내가 왜 그래야 하는건데?"
경수가 우물쭈물거리며 위로 툭 치솟은 제 바지 앞섬을 가리려 뒤를 돌았다. 제 뒤에서 종인이 킥킥거리며 웃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렇지? 만약에 내가 지금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서 다른 차를 한 대 박고 네 시간으로 몇 주 뒤에 나타나면 어쩔래? 그때는 좀 마음을 바꿀건가?"
"너 진짜 못 말린다."
그에 경수가 종인을 약간 째려보았다. 종인이 그런 경수의 모습에 얄궂게 웃어보였다.
"자고로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언제 시간을 또 뛰어넘을지 몰라."
"나는 그게 네가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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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4편 연달아 업뎃했습니다.